김형, 게서 뭐하시오.
윤의 눈과 가네모토 영감의 눈이 마주쳤다. 밝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윤의 눈은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있었다. 가네모토 영감은 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눈이 빨갛다고 느꼈다. 작은 등 하나 없는 산채였다. 오로지 송골송골한 달빛이 유일한 빛이었다. 상대방이 윤이라는 것마저 오히려 추측에 가까웠다. 목소리와 눈. 항상 나를 가르치려 했던 그 눈. 강단과 자애가 어우러진 목소리. 그는 윤을 보자, 마른 횃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저기요. 저기에 조센징 빨갱이들이 있소.
가네모토 영감은 눈을 떴다. 하지만, 몸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저승사자는 이미 제 몸 하나 일으킬 만큼의 기력마저 빼앗아갔다. 소리를 지르며 깬 영감의 앞에는 벌써 며느리가 흰 물수건을 든 채로 앉아있다. 그를 걱정하는 그녀의 눈매가 왠지 윤의 그것과 닮은 것 같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아들이 침실에서 건너왔다. 자신과 꼭 닮아 더욱 사랑했던 아이였다. 싸움도 일등이었고, 공부도 일등이었다. 셈도 밝았다. 가네모토 영감이 세운 공장을 팔아치우고선, IT기업을 세워 몇 배는 더 큰 기업을 만들었다. 그런 아들이 기특했다. 가네모토가 항상 꿈꿔왔고 되뇌던 삶이었다. 내가 조선시대의 가난한 농사꾼 아들이 아니었다면, 똑같은 기회, 아니 비슷한 기회만 주어졌더라도 나는 좀 더 크게 성공했을 것이다. 그의 아들이 이 모두를 증명했다. 아들놈은 정말 그를 꼭 닮았다. 곧 죽을 아버지의 소리에 놀라 달려오면서도, 이 지긋지긋한 병수발이 끝나는 것과 숨겨진 부동산들을 유산으로 받을 것에 대한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한뜻 누그러뜨린 목소리로 아버지는 괜찮으시냐는 그의 물음엔 실망이 배어 있었다. 밥 대신 칡뿌리를 와그닥거리며 씹을 때만큼이나 씁쓸했다. 역시 핏줄은 못 속이는 게로구나. 그의 아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이 본인이라는 것이 안타까웠다. 누군가는 저 사실을 알아야했다. 그래야 아들 녀석도 죽을 자리에 누웠을 때, 삶을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김형, 이번에야말로 일제 놈들을 몰아내는 겁니다. 오늘 밤, 각 마을에서 올라온 우리 동지들이 산채에 모두 모일 겁니다. 동이 트기 바로 전에, 주재소를 습격하고 마을을 해방시킬 겁니다. 이게 다 김형이 힘써준 덕입니다. 감사합니다.
저야, 윤 선생님 하자는 대로 노력했을 뿐인데. 저는 땅도 없고, 돈도 없는 소작농 출신인데. 이 정도 수고로 전부 평등한 세상이 온다면야 열 번이고, 백 번이고 해야지요. 그 놈의 소작 꼬리표 때문에 제 아버지도 목숨을 잃었잖습니까? 복수해야지요. 복수.
거짓말이었다. 가네모토 영감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 진짜 자유를 느꼈다. 뜨내기 이야기꾼이 홍길동이 이야기해 줄 때, 써먹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이 이런 상황일 때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형도 없었다. 오로지 믿을 것은 자신의 능력뿐이었다. 홍길동에겐 도술이 있었고, 그에겐 타고난 셈이 있었다. 어떤 것이 그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셈하는 능력. 윤이 동지들을 기다리기 위해 산채로 올라갈 때, 영감은 남았다. 동지들이 먹을 주먹밥을 마련하겠다는 이유였다. 영감은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마치 도라도 닦는 이처럼, 눈도 감았고, 손도 자연스럽게 벌렸다. 밥도 먹지 않았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날이 저물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또렷하게 들릴 즈음이 되었다. 드디어, 영감이 눈을 떴다. 그리고 미친 듯이 변소로 달려가 오줌을 내깔겼다. 한참을 몸을 부르르 떤 영감은 부엌으로 들어가, 아침부터 만들어놓았던 주먹밥을 마구 입에 쑤셔 넣었다. 결국, 목에 걸린 주먹밥을 기침과 함께 뱉어내야 했다. 남은 주먹밥을 담아둔 소쿠리를 몇 번의 발길질로 남김없이 걷어찼다. 그는 양 손에 주먹밥을 든 채로 주재소로 향했다.
김형이라니. 무슨 가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까. 제가 선생님보다 일찍 다리 밑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선생님 같은 분이 제게 형이라니요. 그냥 원일이라고 부르십시오. 그게 저는 더 편합니다.
영감이 아들을 불러, 진실을 말하기도 전에 사자가 그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영감이 마지막 본 것은 새하얀 얼굴의 윤이었다. 사자의 입은 열리지 않았지만, 영감의 귀에는 또렷이 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형, 갑시다. 이미 늦었소. twitter.com/bintzro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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